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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30년 넘게 일한 이성욱(가명·65) 씨는 퇴직 후 가장 놀란 것이 휴대전화 속 연락처였다고 말했다. “200개가 넘는 번호가 저장돼 있는데 막상 점심 약속을 잡으려니 전화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더라”는 것이다. 명함과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도 함께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그의 고백은 오늘날 한국 중장년층이 마주한 ‘관계 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리서치가 올해 전국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60대의 평균 지인 수는 3.2명으로 전 세대 중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점은 숫자보다 감소 속도다. 같은 조사에서 60대 응답자의 61%는 관계 정리를 위한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자연스럽게 관계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방치한 결과라는 의미다.
KB금융그룹이 지난해 발표한 골든라이프보고서는 더 구체적인 현실을 드러낸다. 행복한 노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건강(48.6%)과 경제력(26.3%)을 꼽았지만, 정작 은퇴 후 가구의 만족도를 비교하면 가족·지인 관계 만족도(54.2%)가 건강(51.1%)이나 경제력(34.5%)보다 높게 집계됐다. 결국 노년에 실제로 행복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돈이나 건강보다 사람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 관계를 하루아침에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윌리엄 초픽 교수가 100여 개국 약 28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노인이 가족과 가까이 지내는 노인보다 더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가 직접 선택한 관계가 노년의 건강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노후 인간관계를 세 개 층으로 설계할 것을 권한다. 첫 번째는 3~5명의 깊은 신뢰 관계로 구성된 핵심층이다. 위기 때 실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정서적 안전망이다. 두 번째는 동호회나 봉사 모임처럼 함께 활동하는 중간층이다. 정기적으로 만나며 삶의 리듬을 유지하게 한다. 세 번째는 이웃이나 가벼운 지인으로 이뤄진 외곽층이다.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가 ‘약한 연결의 힘’이라고 부른 이 관계는 새로운 정보와 기회를 제공하며 고립을 막는 완충 장치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부정적 의미로 쓰이던 ‘주식형제’ 같은 느슨한 관계도 노년에는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함께 웃고 식사할 수 있는 가벼운 연결 자체가 일상의 활력을 만들고 고독을 완화하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가 생사를 함께할 깊은 의리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OECD 통계를 보면 한국에서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약 72%로 OECD 평균(88%)보다 크게 낮다. 보건복지부의 노인실태조사에서는 혼자 사는 고령자의 18.7%가 도움받을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관계가 좁아지는 것보다 진짜 관계가 한두 개라도 있느냐가 진짜 위기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하버드대학교의 성인 발달 연구는 80년 넘게 700여 명의 삶을 추적한 결과 행복과 건강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돈도 명성도 아닌 따뜻한 인간관계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관계는 몇 명이냐보다 얼마나 신뢰롭고 만족스러운 관계냐, 즉 질에서 갈렸다. 관계는 넓히기보다 좁히되, 깊이 있게 가꿔야 한다는 원칙이 여기서 나온다.
연금 계좌에 돈을 쌓듯 관계 계좌에도 시간과 관심을 꾸준히 입금해야 한다. 상대가 지난번 한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다음에 먼저 꺼내는 작은 행동, “그때 말씀하신 무릎 수술은 좀 어떠세요?” 같은 한 문장이 관계를 살린다.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사람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퇴 후 30년을 함께할 사람은 퇴직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조언이 단순한 격려가 아닌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