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회장이 말한 70살 넘어 실패를 대하는 자세 3가지

나이가 들수록 실패라는 단어가 무거워진다. 젊을 때는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었지만, 육십을 넘기고 칠십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맞닥뜨리는 실패는 남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불안과 함께 찾아온다. 건강 관리에 실패했다는 자책, 자식 교육에 실패했다는 후회, 혹은 늦게 시작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의 좌절은 젊은 날의 그것보다 훨씬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 회장은 1991년 자서전의 제목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로 붙였다. 평생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고, 모든 좌절은 시련이라는 이름의 과정일 뿐이었다. 그가 남긴 이 짧은 문장은 중장년의 우리에게 실패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선을 제안한다.

3위 –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본다

실패를 결과로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사업이 안 됐으니 실패, 관계가 틀어졌으니 실패, 계획대로 되지 않았으니 실패. 이렇게 단정 짓는 순간 그 경험은 쓸모없는 과거가 되어버린다.

정주영의 시선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은 시련이다. 시련은 진행형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무언가의 중간 지점이다. 칠십 살에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잘 안 된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익숙해지는 과정의 한가운데다. 육십 살에 건강검진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받았다면, 그것은 관리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신호를 받은 시점이다.

결과로 보면 절망이지만, 과정으로 보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그 차이가 중장년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한다.

2위 –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밀도를 본다

나이 들면 자꾸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에 비해 배울 시간이 없고, 다시 시작할 여유가 없고, 실패를 만회할 기간이 촉박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한 번의 실패를 더 크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시련을 거친 사람은 시간의 길이보다 밀도를 안다. 정주영이 조선소를 세울 때 그에게 남은 시간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의 농도를 높였다. 실패했다고 주저앉아 있는 시간, 후회하며 돌아보는 시간을 모두 다음 시도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바꿨다.

칠십 살에 10년이 남았다고 해도, 그 10년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30년보다 밀도 높은 삶이 될 수 있다. 실패라고 이름 붙이고 거기 머무는 대신, 시련이라고 부르고 거기서 배운 것을 다음 시도에 집어넣는다면 남은 시간의 밀도는 달라진다.

1위 – 끝의 정의를 스스로 내린다

많은 사람이 실패를 실패로 만드는 이유는 남이 정한 끝에 자신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이 정도는 이뤄야 한다, 이 시기까지 이것을 못 하면 늦었다는 사회적 기준이 실패의 선을 긋는다.

정주영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은 끝의 정의를 자기 손에 쥐겠다는 선언이다. 남들이 보기에 망한 사업이라도, 본인이 거기서 배운 것이 있고 다시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세상이 정한 성공의 시점을 놓쳤어도, 본인이 여전히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진행 중인 시련이다.

육십이 넘어 자식에게 실패한 부모라고 스스로를 낙인찍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관계는 생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지금까지 서툴렀다면 그것은 시련의 한 구간이고, 지금부터 다르게 할 수 있다면 실패로 닫을 이유가 없다. 끝을 누가 정하느냐가 실패와 시련을 가른다.

오늘 한 가지만 해보자. 최근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일을 하나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문장에서 ‘실패’라는 단어를 지우고 ‘아직 진행 중’이라고 바꿔 적어본다. 종이에 써도 좋고, 머릿속으로 되뇌어도 좋다. 단어 하나를 바꾸는 것만으로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끝났다고 생각한 일에 다시 손을 뻗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실패는 없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시련만 있을 뿐이다.